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미국인 올리버는 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게 되었나?
    국부 대통령 우남 이승만/로버트 T 올리버 (미국 연설학회장)의 우남 이야기 2023. 5. 6. 00:21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 박사와의 첫만남을 떠올려보았다. 
    그에게 이승만이란 인물을 소개해 준 것은 한 목사님이었다.
    에드워드 장킨, 한국에서 출생한 그 목사님은 부모님이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을때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주 루이스버그시 장로교회 담당 목사였던 그는 같은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버크넬  대학교의 교수, 올리버 박사와 친분이 있었다.
    올리버 박사가 버크넬 대학교의 교수직을 떠나 휴식중이었을무렵, 이승만 박사를 소개받았고
    1942년 9월 중순 경, 워싱턴 DC 근처의 간이 식당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승만 박사의 또다른 희생양(?)이 되고 마는 올리버 박사는 전시 식량 관리 계획처의 책임자였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망명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한국에 선교사로 오셨던 분들의 인맥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미국인들을 소개받고,
    소개받은 미국인들을 친구로 만들고, 최종적으로 미국인 친구들을 한국 독립운동에 부려(?)먹었다.
     
    잠시 두 인물의 나이차를 살펴보자.
    당시 이승만은 꽃다운(?)이 아닌 곧 다운(down!)될지 모르는 67세의 고령이었다.
    반면에 올리버는 팔팔한 33세의 청년이었다.
    미국에서 40년 세월을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 힘썼던 이박사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렸다.  
    올리버 박사와의 나이차는 34년으로 아들뻘, 아니.. 일찍 결혼하던 당시엔 거의 손자뻘에 가까웠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미국인을 잘 사귀어서 장차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으려 했던 이승만 박사....
    혹자는 이승만이 미국의 힘에 기대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두고 자주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한다.
    그런데 이것은 독립운동에 관한 것이 아닌가?
    자주적 허세를 위해 자존심을 부릴 여유따위는없는것이다.
    나이가 어린 미국인에게도 자존심 버려가며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해야할 독립인 것이다.
    독일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했던 영국의 처칠은 미국에 수없이 많은 도움을 요청했고,
    프랑스 망명 정부의 지도자 샤를 드골 또한 강대국에게 수없이 지원을 요청했다.
    그들도 국권 수호, 국토 수복, 조국 독립을 위해서 자존심을 버리고 강대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를 주저치 않았던것이다.
     
    이승만과 처칠, 샤를 드골은 똑같이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으며 "형님, 형님, 형님빽만 믿겠습니다." 라고 하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3명중 2명은 자국민에게 국부로 추앙받으며 온 국민의 존경과 감사를 받지만, 1명에게는 이상하리만치 가혹한 비난의 화살이 계획적으로 쏘아지고 있다.
    거의 북쪽에서부터 더불어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들은 대체 누구의 지령을 받고 쏘는 화살이란말인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