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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사] 영웅 김영옥
    한국 근현대 역사/한반도 전쟁사 2023. 5. 26. 16:46

    [전쟁사] 카테고리에는 전쟁 영웅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먼저 생각해볼 점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방지하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승리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전쟁에 대비해야만 하는 운명 공동체이다.
    전쟁은 왜 일어나고 어떻게 진행되는가? 이 정도는 상식으로 알아두어도 좋을 것이다.

    신냉전 개막의 시대가 열렸다.
    역사 문화 이데올로기 전쟁, 경제(화폐) 전쟁, 물리적 전쟁

    서방-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미국-대만-중국 분쟁도 악화되고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진행 과정에서 피해를 줄이는 일에 대해 다같이 생각해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리고 매번 영웅들에게만 의존할텐가? 각자가 이순신이 되고 영웅이 되어 전쟁을 막자.
    그리고 전쟁이 나면 반드시 승리하자.
     
    <영웅 김영옥>
    우리 민족은 존경할만한 군인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강감찬, 이순신, 국가를 지키기 위해 별이 된 훌륭한 영웅들이 수없이 많지만 너무 과거로 가지는 않으려 한다.
    먼저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영웅 김영옥에 대해 알아보자.


    1919년 미국에서 태어난 고 김영옥님은 2차대전 대독 유럽전선에서 공을 세웠고 한국 전쟁에도 참여한 훌륭한 군인이자 사회 봉사 활동가이다.

    이제는 별이 되어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영웅의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영웅을 낳고 기른 부모님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웅 김영옥을 낳은 두 분 부모님에 대한 나의 분석>
    김영옥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김순권 선생이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한국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미국 유학을 꿈궜던 노라 고 여사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를 다녔다.
    인천 출신인 아버지 김순권 선생은 경신학교를, 수원 출신인 어머니 노라 고 여사는 이화여전을 나왔다.


    이들의 학창 시절 스승으로 만났던 미국 선교사들이 들려준 미국 이야기가 미국행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김순권 선생님(이하 호칭 생략)과 노라 고 여사는 191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김순권은 강제병합 상황의 조선을 영구히 떠나 미국에 완전 정착하는것을 목적으로 이주한듯 보인다.
    반면 노라 고는 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후원자인 미국 선교사와 함께 시애틀로 갔던것이지만 법적 혼인 상태에 있던 남편 김순권의 호출로 유학의 꿈을 포기하였다.
    부부는 함께 LA에 정착하였다. (1916년)

    당시 미국 개신교 선교사님들은 조선 청년 리더 양성에 진심이셨던 모양이다.
    우수한 조선인 기독 청년을 선발해서 미국 대학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을 졸업한 청년 이승만은 선교사의 추천서를 갖고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최고의 대학들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취득했다. 귀국 후에는 YMCA에서 활동하며 기독교 민족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승만은 당시 수많은 조선인 기독 청년들의 마음에 기독교적 민족 독립의 불을 지폈을것이다.
    조선 복음화와 독립을 위해 택함입은 기독 청년들이 생겨났다.
    김순권과 노라 고는 같은 기독교계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의 YMCA 활동 소식을 들었거나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이승만처럼 미국으로 향했다.

    당시 조선인 청년들이 미국행을 결심한 이유는 또 있었다.
    한일강제병합(1910) 이후 벌어진 105인 사건(1911)
    으로 한국 교회는 일제의 핍박을 겪게되었는데
    일제는 조선 식민 통치의 가장 큰 방해 세력을 조선 기독교 집단으로 보았다.
    https://naver.me/IIq2vNwz

    105인 사건

    1911년 조선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둔 사건으로 애국계몽운동가의 비밀결사였던 신민회

    m.terms.naver.com

    일제가 독립운동을 하던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워 핍박한 105인 사건(1911년)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이승만은 미국 사회에 일제가 벌인 만행을 폭로하는 책 <한국교회핍박>을 출판해 알리며
    미국 기독교계에 일제의 조선 기독교 탄압의 실상을 고발했다
    그 뒤 미국 기독교계, 정계 인사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주한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 중 미주 한인들이 제일 자금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들의 애국헌금이 없었으면 상해 임시정부와 같이 외국의 온정에 의존해야만 했던 단체들이 유효한 활동을 하기 어려웠을것이다.

    미국으로 이주한 초기 한인 이주민들이 주로 그러했듯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했다.
    하와이에서 돈을 모아 다시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캘리포니아->LA

    김순권은 동지회 회원으로서 이승만 박사의 독립노선을 지지했다.
    동지회 출신으로는
    임병직(전 한국 외교장관)
    알프레드 송(전 캘리포니아 상원 의원)
    이순기(배재학당 출신 독립운동가로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의 아버지)
    등이 있다
    열악한 타지 생활 가운데서도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독립 운동가 지원에 모금을 아끼지 않았던 수많은 초창기 미주 한인 영웅들에 대하여 머리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부분은
    미주 한인들간 서로 다른 독립노선을 지지해서 발생한 파벌 갈등이다.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는 기호파와 서북파의 지역갈등이 유래이기때문에 뿌리가 깊다.

    미국 활동 독립운동가들 중
    이승만 VS 박용만 vs안창호
    세 인물들의 독립 노선은 달랐다

    김영옥의 가족과 안창호의 가족은 몇 집 건너 이웃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기독교인이며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이지만
    이승만 노선과 안창호 노선은 갈등과 반목으로 서로 출석하는 교회도 달랐을 정도였다.

    김영옥의 아버지 김순권은 이승만 노선을 지지한 동지회 소속으로 대한인기독교회에 출석했고
    안창호와 그 지지자들은 국민회, 또는 흥사단 소속으로 로벗슨 한인 연합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1912년 캘리포니아에서 설립된 대한인 국민회 주도권을 두고 이승만 vs 박용만 vs 안창호 삼파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승만 박용만 안창호 3인은
    모두 고종 독재 하에서 망해가는 조선을 살리고자 활동했던 민주화 투사이자, 일제의 지배에 맞선 독립 투사이자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만민 공동회 활동으로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비판했던 이승만은 전제 군주 고종의 무능에 맞서 미국식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하려 했던 최초의 민주화 투사이다.
    고종 폐위 가담 음모에 연루되어 투옥된다.
    안창호 또한 이승만과 함께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했었다

    이승만의 한성 감옥 옥중 동지였던 박용만도 기독교인인데 당시 감옥 안에서 만난 이승만에게 전도 당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만난 박용만과 의기투합하여 옥중 동지로서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승만의 하와이 정착도 박용만이 도왔을 정도로 각별했던 사이였지만 나중에 독립 방향에 대한 뜻이 달라 사이가 틀어진다

    급진적 무장 투쟁 독립 노선을 추구한 박용만
    점진적 실력 양성 독립 노선을 추구한 안창호
    위의 두 노선이 융합 된 독립 노선을 추구한 이승만

    박용만은 독립 방향으로 무쟁 투쟁 노선을 추구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승전보는 민족에게 자긍심과 투쟁 동력을 북돋워줬다.
    그러나 일본군 한명을 죽이면 조선인 마을 하나가 불타는 상황을 우려했던 이승만은 민족의 피해를 줄이는 비폭력 투쟁을 선택했다.
    이승만은 민족 손실을 극대화 시키는 무장 투쟁을 계속하면 투쟁 동력이 금방 동날것으로 판단했다

    사실상 나라 잃은 조선 이주민 집단의 무장력과
    일본 제국 사이의 국력 차이는 너무나도 컸기에 (당시 일본 제국은 세계 5위 군사 강국)
    무력만으로 일본에게서 독립을 쟁취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초기에 이승만을 지지했으나 무장 투쟁 노선을 추구하면서 이승만과 멀어진 박용만은 군사 훈련을 위해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설립했다
    (소년병 학교 출신으로 유한양행 설립자인 유일한 박사, 정한경 박사 등이 있다)
    1914년 대조선 국민군단등도 창설했으나 미국 정부는 당연히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1917년 해체)
    어느 국가에서 자국 내 외국인의 군사 활동을 허락하겠는가?
    당장 대한민국에서 외국인들이 군사 단체를 만들고 훈련한다면 이를 합법적 활동으로 승인해서 허용할 수 있을까?
    당장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되므로 해산할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 내에서 무장 투쟁 단체를 유지하는데에는 비용도 많이 들고 미국 정부에게 합법적인 활동으로 승인받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승만은 무장 투쟁이 필요하지 않다고만 생각했던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시기가 좋지 않았다
    1차 대전에서 미국과 일본은 동맹국 사이였다.
    우호적인 미일 관계 속에서
    미국을 우리편으로 만들어야 했던 이승만은
    미국 주류 사회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며 행동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일본이 미국과 사이가 나빠지기만을 기다리며 민족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과
    외교 독립 운동을 병행했다.
    이승만은 동양 평화를 위해 미국을 이용하려고 했던 유일한 아시아 지도자였다.
    대한민국이 러시아, 일본,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독립국이자 중립국으로 역할을 할때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것을 통찰하셨다.
    우리 이웃 국가들은 모두 영토 야욕이 있지만
    미국은 영토 야욕이 없는 바다 건너의 풍족한 땅을 가진 강대국이다.
    국제 정치의 본질을 본 이승만은
    미국을 이용해 독립을 쟁취하고 한반도의 영구한 평화를 이룩하고자 했다
    그래서 외교 독립 노선을 전력으로 추구했다

    그리고 무장 투쟁을 이어갈 수 없게 만든 계기가 된 사건이 1921년 발생한다.
    자유시 참변, 흑하 사변으로 불리는 이 비극으로 대한 독립군은 궤멸된다. 공산당의 대립이 가져온 민족 상잔의 비극으로 이후 독립군 활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적이지 못했고 소련군에 편입되거나 중국군에 편입되어 외국인의 명령과 지휘를 받으며 싸워야 했다.
    그렇게 나라 잃은 조선 남자들은 적백 내전과 국공 내전에 총알받이로 이용되었다.
    독립을 위해 싸운게 아니라 외국군의 정권 다툼에 이용된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이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독립이라는 대계를 이뤄야 하는 상황에서 무장 투쟁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이승만이 무장 투쟁에 적극적으로 돌아서게 된 것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난 다음이다.
    이승만의 외교노선은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을 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이 미국의 적이 될 것을 6개월 전에 예측하고 이를 경고하기 위해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란 책을 미국에서 출판한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의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다.
    이승만은 재미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분해 대우해줄것을 미국 정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는 미국과 일본이 전쟁중인 상황이었으니 미국내 일본인들에 대한 차별적 대우가 어떠했는지는 상상할 수 있을것이다.
    책 <영웅 김영옥> 83, 84P에 당시 미국 거주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한 시설의 열악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외교 독립 노선이 빛을 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또한 이승만은  기존에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던 무장독립투쟁 노선도 추진했다(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에 선전포고 후 OSS 국내진공작전 준비)
    그러나 실질적인 무장 투쟁 역량이 약화되었던 상황이라 해방군으로서 연합군의 일원이 되지 못하였다.
    적어도 10만의 상비군이 있었다면
    승전국 입장에서 우리 손으로 해방을 쟁취할 수 있었을텐데 참 아쉬운 부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무장 투쟁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https://m.blog.naver.com/mahanaim0702/222878541188

    OSS, ‘미주 한인청년과 광복군’ 활용한 이승만의 무장투쟁 수용(류석춘 교수)

    (40) 이승만의 무장투쟁 임정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 1942년 2월 20일 국무부 랭던보고서 신탁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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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안창호는 민족의 실력 양성이 무력 투쟁보다 우선되어야함을 피력한 계몽 독립 운동 노선이었기에
    이승만 노선과 공통점이 많았다.
    이상촌, 동지촌 건립등의 활동도 비슷하다.
    다만 안창호는 실력 양성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실력 양성 운동은 우리 민족의 실력이 향상 되는 동안 일본의 실력도 계속해서 향상된다는 모순을 극복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것같은 독립에
    계속해서 힘을 보태줄 것을 호소해야 했다
    의욕은 점차 줄게 될 것이고
    새롭게 유입되는 인력도 줄어든다
    실제로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국했을 때
    연령대가 모두 높았다
    다음 세대의 독립 운동가들이 추가적으로 유입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인이나 미국인, 중국인, 소련인으로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우선 되는것은 그 사회에서의 생존이었다
    그 국가에서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주류 언어를
    사용해야 유리하다.
    실제로 이민 1세대 2세대 3세대를 거치면서 우리말을 할줄 아는 숫자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조선인은 점차 그 정체성을 잃어버릴것이 분명했다.
    이렇듯 실력 양성 운동의 한계도 명확했다.
    그러나 독립한다 한들 국가를 운영할 실력이 없으면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여전히 빈곤과 가난, 독재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실력 양성론은 꼭 필요한 독립 노선이었다.

    이승만도 실력양성을 위해 미주 하와이에 민족 학교 설립 후 여성 교육, 동지촌 건설로 민족 자립형 산업에 도전했다.

    다음엔 영웅 김영옥의 소년기,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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