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1960-70년대 선동가들의 삶과 투쟁
    이승만과 관련된 인물 기사 링크 모음/잘못된 소신을 고집했던 인물들 2023. 5. 12. 19:16

    다음 두권의 책은 공산주의 혁명을 꿈꿨던 자들의 회고록이다. 
     
    인혁당 사형수 이수병 평전 <암장>, 지리산, 1992
    어느 통일 운동가의 육필 수기 <비트>. 일과놀이, 1993
     

    제주4.3폭동, 4.19혁명, 5.18광주 민주화 운동 등,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혁명과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
    북한이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충격적인 기록이다.
     

    이 책들을 좌파의 입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글(김정래/조직국장)을 읽어보았다.
    -인터넷 링크-
    사회진보연대 기관지 :: 책소개 :: 1960-70년대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 (pssp.org)

    사회진보연대 :: 1960-70년대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

    1950-70년대 격변의 시기에 소년 빨치산과 사형수, 그리고 광주항쟁의 전사가 있었다. 선배 혁명가들의 투쟁과 삶은 단지 개인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각인된 역사적 흔적이다. 그들의

    www.pssp.org

     

    해방 이후 남한 사회는 전쟁과 폭동 그리고 대규모 사회격변을 경험하게 되고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좌우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와 직면해야만 했다.

    당시 남한 사회에는 선동 진영의 반란적 경향들이 들끓고 있었다.
    사회 정치적인 체제 변혁을 꿈꾸는 사람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월북 말고는 거의 없었다. 
    이 당시의 좌익 활동가들은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소련에 의한 체제변혁만을 진리로 여길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란 '내전'을 거치면서 사회 선동의 전술이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고, 정치적 공간을 현격히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전후 사회 선동은 보수적인 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다시 발전하게 된다.

    일제하 및 미소군정기의 전통적 좌익 활동가들은 기존 사회 지도층의 분열과 정치적 위기에 따라 재등장하게 되고
    4.19 이후 새롭게 성장한 변혁적 선동가와의 결합을 시도한다.
     혁명에 뛰어든 이들의 조직적인 이념 선동은 대중세뇌의 성공과 보수 계층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목표로 하여 진행된다.
    남한의 보수계층은 반란 선동적 조직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정치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좌익의 내란선동에 대한 보수계층의 방지 노력은 1960-70년대의 여러 '검거활동'들로 표출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보수 세력의 정치적 위기와 반란 세력의 조직적 선동 활동을 일명 '용공논쟁'이라는 이념대립으로 맞물리게 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비트, 암장의 주인공인 김세원, 이수병은 정말 좌익들이 말하는대로 통일 운동가일뿐인것일까?
    아니면 좌익 선동의 주동자들로서 전 생애를 통하여 남한사회의 붕괴를 위하여 온몸을 바친 사람들일까?
      매카시즘의 희생자라고 여겨졌던 인물들이 나중에 베노나 문서의 공개로 인해 실제 간첩으로 드러난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제 치하의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사회과학 이념서클을 조직하고, 빨치산 폭동과 4.19혁명, 인혁당, 민청학련, 남민전, 광주항쟁에 이르기까 거침없이 굽이쳐 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각각 정세 속에서 선거논쟁, 조직논쟁, 북한에 대한 태도, 중-소 논쟁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들의 사상과 행동, 삶 속에서 남한의 좌익적 반란 선동의 면면한 지속성을 관찰할 수 있다.

    <빨치산의 꿈과 좌절>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등의 조직사건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었으며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하고  투쟁해온 데 따른 필연적 귀결이었다.
    1960-70년대 조직 사건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멀리 해방공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미소군정기와 분단조국의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민청 가입, 소년빨치산 투신 등 이들이 어린 나이부터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반대한민국적 길을 걸어가게 된 시작이었으며 계기가 되었다.

    <비트>의 저자인 김세원은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고 있던 자형인 조규연의 영향을 받는다. 
    1946년 화순중학교에 입학한 김세원은 학내에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을 조직하고 외곽 조직으로 민주학생연맹(민학련)을 조직한다. 
    조선공산당의 지시로 화순중학에 부임한 배인수 선생으로부터 사회과학과 체계적인 이념 지도를 받는다. 
    1948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중심으로 건국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민학련은 동맹휴학 들어갔다. 
    제주4.3폭동, 여순군반란 등의 여파로 공산당 체포작전이 벌어지고, 1949년 3월 25일 남로당 특수부 조직책인 김세원의 자형 조규연이 경찰서로 연행되어 총살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세원은 화순군 학도자위대장을 맡게 되고, 9.28 후퇴 (9.28 서울 수복을 공산주의자들은 후퇴라고 표현) 당시 남로당 유치지구당(장흥군 유치면 화학산) 화순군당 소속으로 유격대에 합류하게 된다. 
    1951년 3~4월경 토벌대와의 화학산 전투 이후 빨치산 근거지는 무너지게 된다. 
    입산한지 1년만에 화순 빨치산 90%가 전사하거나 하산하게 되고 일부는 자수하게 된다. 
    김세원은 마을 근방의 산골에 비밀 아지트를 두고 활동하다가 9월경 친인척에 의하여 체포 형식의 강제 자수 후 풀려난다. 
    빨치산 색출 작업이 한창일 때, 공적인 신분을 회복하기 위하여 1952년 3월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7월경 증명 불소지로 가두 검색에 걸려 제주도 수용연대로 끌려가 강제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5.16군사혁명, 공산화 위기 극복>
    4.19혁명 이후 이어진 민주당 신,구파 갈등기는 경찰 세력의 숙청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했다. 
    1960년 7.29 선거를 앞두고 조직된 사회대중당은 현실 정치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김세원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출신 선동가들과 협의해 사회대중당 전남도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참가했으나 정치 진입에는 실패한다. 
    선거 후 김세원은 서울에 상경하여 전국에서 올라온 동지들과 분열된 사회대중당의 개편과 노선 문제를 숙의한다.
    이후 김세원은 사회당 창당에 참여하게 되고 전남도당 청년학생 지도책을 맡게 된다. 
    김세원은 사회당 주도로 건설된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과 민족 자주 통일협의회(민자통)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한편 1961년 5월에 들어서 남북 통일운동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승만은 무너졌으니, 이제 분단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당시 운동세력 내의 공감대를 배경으로 하여 혁신정당, 청년운동, 학생운동은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한 운동으로 수렴된다. 
    그것의 조직적 표현이 바로 '민자통'이라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적화통일운동 세력의 체제전복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있었다. 

    한국전쟁이 휴전한지 8년도 채 안되어 '가라!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통일 선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이야기---------1961년 민족통일연구회(민통연), 민자통, 민민청 결성을 주도했던 좌익들은 박정희의 5.16 군사 혁명으로 인해 좌절하게 되었다.-------

Designed by Tistory.